진하해수욕장이 훤히 내려다 보이는 곳
그곳에 조상의 혼이 숨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왜성(矮城)
왜(矮)국의 침입이 잦았던 지금으로부터 약 500년전, 임진왜란(1592)을 전후로 울산은 왜군이 경주, 안동, 문경 등 내륙으로 진군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였다.
쓰시마해협을 건너온 왜군은 울산, 부산 등지에 차후 자국에서 건너올 배들의 손쉬운 정박과 언제 있을지 모를 공격과 방어에 만전을 기하기 위해 성을 쌓았는데, 그 중 하나가 울주군 서생리에 있는 서생포왜성(문화재자료 제8호)이다.
서생포왜성은 임진왜란이 일어나던 해인 1592년(선조 25년) 구마모토 성주인 가토 기요마사가 축성한 성으로, 성 주변 해자(垓字 : 적과 동물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고대부터 근세에 이르기까지 성 주위를 파 경계로 삼은 구덩이)를 포함해 총 면적 151,934㎡, 동서 길이 2.5km, 성벽 높이 5~8m(현재 2~6m)로 우리나라에 있는 왜성 30여개 중 가장 큰 성이다.
일본의 사료엔 봉화성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임진왜란 때 부산진성, 구마가와성을 연결하는 봉화대의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서생포왜성의 모습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수직으로 높이 솟은 성벽에 동서남북으로 큰 성문이 있는 모습이 아니다. 산정상에 본성을 두고 외곽으로 6m의 성벽을 60도 정도 기울게 해 계단식으로 돌을 쌓았으며, 성 전체를 여러 구역으로 나눠져 있는 특이한 구조다. 이는 여러 곳에서 독립적인 전투를 할 수 있도록 한 왜성의 전형적인 형태다. 400년이 지난 지금도 남문의 일부 훼손을 제외하면 성곽의 형태가 옛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어 16세기말 일본성곽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층층이 쌓인 조상혼

차를 몰고 ‘외성내의 길’에 도착했다. 여기서부터 차를 몰고 오를 수 없다는 표지판이 보인다. 차에 내려 먼 산을 바라보니 우거진 나무숲 사이로 봉긋하니 솟은 망루대가 희미하게 보인다.
시원한 바다 바람이 불어옴에도 불구하고 이마에 땀이 송글송글 맺힐 정도로 왜성은 해발고도 133m, 가파른 곳에 위치해 있다. 멀리서 층층이 쌓인 돌들을 보니 ‘산아래부터 정상까지 이 많은 돌들을 어떻게 쌓았을까’하는 궁금해진다. 전쟁준비에 바빴던 왜군은 아니었을 것이다. 부산대학교 한일문화연구소가 간행한 『경남의 왜성 유적』에 따르면 축성 때 동원된 인원만 약 10만 명이라고 한다. 물론 왜군 10만 명을 가리키는 것은 아니다.
이곳의 모든 돌들은 약 1km떨어진 곳에 위치한 만호진성을 비롯 주변 석재를 헐어 만든 것이다. 때문에 현재 만호진성은 거의 흔적이 남아있지 않다.
남측의 성벽을 따라 가파른 오르막길을 지나니 성문이 없는 제3성 입구가 나타난다. 울주군에서 간행한 서생포왜성 간행물에는 왜성의 출입구는 총 11개였다고 표시하고 있다. 이렇게 많은 입구를 둔 이유는 임진왜란 때 세워진 성으로 방어가 아닌 공격을 위해 세웠기 때문이다. 입구에서 보면 성문안으로 내부가 전혀 보이지 않는다. 이는 전쟁시 적군의 공격을 지체시키고 아군의 공격을 수월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서생포왜성의 입구 형태는 총 4종류로 ㄷ자형, ㄹ자형, ㄴ자형, 그리고 직선형이 있다. 
제3성을 지나니 멀리서 보았던 망루대가 보인다. 그 위에 올라서니 이름 그대로 멀리 진하해수욕장이 한눈에 내려다 보인다. 나중에 들은 사실이지만 현재 진하해수욕장 인근 주거지는 바다였고 현재보다 해수면이 높았다고 한다. 때문에 임진왜란 시 선착장이 있던 곳은 우거진 나무와 바위만 가득할 뿐 선착장의 모습을 찾아보긴 힘들다. 망루대를 지나 조금 더 오르니 높이 6m가량의 높다란 성벽이 나타난다. 어찌 보면 기어오를 수도 있을 만큼 약 60도 가량 사선으로 쌓아올려져 있다. 이 높다란 성벽을 지나면 비로소 내성 정상이 나타난다.
땀이 범벅이 된 채 올라선 정상, 탁트인 공간 뒤로 천수각이 있던 장소가 보인다. 임진왜란에서 패배한 왜군은 이곳에 지어진 모든 건물을 파괴하고 떠났기 때문에 천수각 역시 석단만이 남아있다. 현재는 이 석단 위에 3~5층 규모의 천수각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서생포왜성이 가지는 의미 중 하나가 바로 이곳 천수각터로, 사명당(임진왜란 시 많은 전투에서 공을 세웠던 승려)과 적장 가토 기요마사 간의 4차례에 걸쳐 회담을 이뤄졌던 곳으로 사명당은 적의 본부에서 회담을 하며 적진을 살폈다고 한다.

 

 

구마모토시의 관광상품
정상에 오르면 방명록이 있다. 누가 다녀갔나 호기심에 몇 페이지를 뒤적이니 일본어가 보인다. 문화재관리인 최인수 씨는 구마모토 시민들이 남기고 간 방명록이라 설명해준다. 우리에겐 왜적 장수로 기억되는 가토 기요마사, 이곳에 들른 일본인들에겐 어떠한 조상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을까. 1965년 한국과 일본이 우호협력관계가 된 이후 일본인들은 이곳에 벚나무를 심어 벚꽃이 만개할 무렵 관광을 온다고 한다. 특히 왜장 가토가 살았던 구마모토 시에서는 주민들의 한국 필수 관광코스라고 한다. 400년전 그들의 선조가 우리 조상의 피땀으로 만들어 놓은 성과 후대에 심어 놓은 벚나무를 생각하니 이 큰 돌들을 1km나 옮긴다고 피땀 흘렸던 우리 조상들이 생각나는 것은 왜일까.
장군수(천수각 주위에 만들어진 성내의 우물), 누각(병사가 살며 무기 등을 보관하던 장소) 등을 알리는 표지판을 따라 돌아다녀도 조상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 아직도 건재하게 쌓여있는 성벽들 뿐이다. 얼마나 잘 지었던 것일까. 왜장 가토는 철군시 성을 쌓는데 동원된 이곳 주민들을 데리고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한다. 한때 한 방송사에서 성(性)이 ‘서생’으로 구마모토에 살고 있는 재일교포 몇 명을 초청했던 일이 있었다. 그들이 바로 이 성을 쌓고 끌려간 선조들의 핏줄이었던 것이다.
현재는 유원지로, 또 초등학생들의 견학코스로 발길이 끊이지 않고 있는 서생포왜성. ‘이곳은 벚꽃이 일품’이라는 방명록의 글귀보다 ‘뼈아픈 역사와 돌 하나하나 어루만졌을 조상들을 생각난다’는 글귀를 보고싶다는 생각을 하며 성을 등지고 내려온다.

 

주변에는…
진하해수욕장 : 백사장을 둘러싼 송림과 명선도를 볼 수 있다.
간절곶 : 동북아시아에서 해가 제일 먼저 뜨는 곳.
외고산 옹기단지 : 전국에서 가장 큰 규모의 옹기마을.
서생란 하훼단지 : 선물이나 장식으로 제격인 난들이 가득하다.
Tip
금토일9시~16시30분까지는 문화관광해설자가 있어 자세한 설명을 들을 수 있다.

 

 

 

 

 

 

 

 

 

□ 취재/사진 : 성두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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