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안아빠1446
2007. 6. 7. 15:33
2007. 6. 7. 15:33
우리 고장 현충시설 탐방 ①
박상진 의사 생가 |
성두흔 |
2007-06-0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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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 의사 생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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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국보훈의 달 우리 고장 현충시설 탐방 ① 박상진 의사 생가
북구 송정동 355번지에는 송정출신으로 국내독립운동의 대표적인 단체인 대한광복회의 총사령으로 활약한 박상진 의사의 생가가 있다. 1850년쯤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박상진 의사 생가는 울산시가 2005년 13억 원을 들여 복원에 들어가 박 의사의 밀랍인형과 각종 자료, 그리고 유물 복원 등을 거쳐 오는 8월 15일 광복절에 맞춰 일반인에게 무료로 개방할 계획이다.
역사를 배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역사가 무엇이길래 왜 일본과 중국은 주변국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역사왜곡을 자행하고 있을까. 이 질문의 중심엔 ‘민족의 정체성’이 자리잡고 있다. 개인으로서나 사회구성원으로서 자신의 존재에 대한 바른 인식을 바탕으로, 국민들이 정체성을 가지면 애국심이 강해지고 나라도 부강해진다고 볼 수 있다. 역사학자들은 공무원 시험에서 국사가 제외되고, 수능시험에서도 국사가 선택과목으로 전락하고 있는 현실에 대해 많은 우려를 나타낸다. 실로 지난해 수능시험에서 국사 과목을 선택한 학생은 전체의 5% 내외, 국사를 알아야 서울 주요 대학에 갈 수 있다는 것이 기삿거리로 될 만큼 국사는 따분한 암기 과목으로 전락하고 있는 것이다. 6월은 호국보훈의 달이다. 차츰 무뎌져가는 역사의식을 다시 한번 생각할 때이다. 가족과 함께 역사 공부를 하며 어린 자녀들에게 민족의 정체성을 심어주고 자긍심을 가질 수 있는 곳. 그 중 하나로 울산을 빛낸 인물인 박상진의 생가를 찾아가봤다.
조용한 시골에서 치열했던 역사를 배운다 북구 송정동의 한적한 시골길을 지나다보면 일제시대 치열했던 항일투쟁의 중심에 서 있었던 고헌 박상진 의사(1884~1921)의 생가가 나타난다. 역사적으로 한 획을 그은 인물이 우리 지역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울산시민들에겐 충분히 자긍심을 가지게 하는 곳이다. 박상진 의사 생가는 1850년쯤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며, 박 의사 순국 후 제대로 관리되지 못하다가 최근 역사적 재조명이 이뤄지면서 1997년 10월 시 유형문화재 자료 제5호로 지정됐다. 이 집은 행랑채, 사랑채, 안채 등 모두 4개의 건물로 이루어진 기와집으로 전체적으로 볼 때 ‘ㅂ’자형 구조를 가진 조선 후기 양반 살림집이다. 사랑채는 마루와 방을 갖추고 있으며 뒤의 중문을 지나면 ‘ㄱ’자형 안채가 나타난다. 남녀의 공간을 작은 문으로 간단히 구획하여 각각의 공간에 독립성을 확보하고 있다. 당시 대지주였던 박 의사는 가산 중 논밭 900여 두락을 저당잡히고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회를 차려 국내의 독립운동기지 및 각종 연락기관으로 삼는 등 모든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사용하여 집안이 몰락하였고, 이 집도 남의 집에 넘어갔다. 시에서는 제작년 이 집의 복원공사에 들어가 올 4월경 공사를 마쳤다. 지금은 박 의사의 밀랍인형과 각종 자료, 그리고 유물 복원 등이 진행 중이며 오는 광복절에 맞춰 준공식과 함께 일반에 무료로 개방된다. 시는 생가복원 외에도 박 의사 기념관을 건립해 관련 자료와 유적을 다양하게 수집하고, 각종 역사문화 프로그램을 개발하는 등의 기념사업도 추진할 계획이다.
대한광복회 총사령 고헌 박상진 의사 조선말기인 1884년 울산군 농소 송정리(현 울산시 북구 송정동)에서 장남으로 태어난 고헌 박상진은 16세가 되던 해 당시 학덕이 높은 왕산 허위(1854~1908. 1907년 13도 창의군 지휘)의 문하에 들어가 정치와 병학을 배우며 의렬사들의 전기를 탐독하고 스승의 혁신유림의 길을 밟게 된다. 1907년 스승 허위가 고종황제의 밀명을 받고 의병활동을 하다 체포돼 사형 당하는 모습을 본 박상진은 이후 평민의병장으로 유명한 신돌석과 의형제를 맺고 김좌진을 만나 뒷날 대한광복회 부사령으로 영입하는 계기를 만든다. 양정의숙에 진학, 법률과 경제를 전공하고 1910년 판사시험에 합격하여 평양법원에 발령받았으나, 경술국치(1910년 일본에게 국권 빼앗김)로 사퇴하고 1911년 만주로 건너간다. 조국의 아픔을 뼈저리게 느낀 그는 일제를 몰아내기 위해선 의병을 능가하는 군사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해외에서 군대를 만들기 위해 국내에서 자금과 인력을 공급할 수 있는 조직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한다. 이후 1912년 가산 중 논밭 900여 두락을 저당잡혀 대구에 <상덕태상회>라는 곡물상을 차리고 상점을 가장한 독립운동의 거점으로 자리잡아 갔다. 국권회복 방향을 무장독립전쟁에 두고 비밀, 폭등, 암살, 명령의 4대 강령을 구상하고 1915년 대구 달성공원에서 비밀 결사대인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이 되어 김좌진을 부사령으로 임명한다. 당초 대한광복회는 만주 독립기지에서 혁명군을 양성하는 한편 국내에서도 조직을 확대해가다 일본이 국제적 고립에 빠질 때 전국적으로 일시에 봉기하여 독립을 쟁취한다는 계획을 가졌었다. 하지만 군자금 모집에 있어 친일부호들의 외면으로 당초 계획을 수정, 민족의 경각심을 일으키기 위해 친일부호 처단과 같은 의협투쟁을 전개한다. 1917년 칠곡부호 장승원을 처단케 했으며, 1918년 친일인사 박용하를 처단함으로써 대한광복회의 이름이 알려지게 되었다. 1918년 조직이 발각되면서 박 의사도 모친상을 계기로 잡혀 사형을 언도받은 후 1921년 8월 대구형무소에서 순국하였다. 정부에서는 박 의사의 공훈과 애국충절을 기리고자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 취재/사진 : 성두흔 기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