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그러진 30 계획
글|성두흔 기자
냄비 뚜껑에 연필을 대고 스케치북 위에 둥그런 원을 하나 그린다. 원 가운데에 연필을 찍고 원둘레를 향해 자를 대고 정성껏 여러 갈래의 줄을 긋는다. 그리곤 8시 기상 후 체조 및 세면, 9시 아침밥, 10시부터 12시까지 공부, 그리고 점심밥 한 시간 후 또 공부….(아마도 저녁 9시까지 공부와 휴식의 반복이었던 것으로 어렴풋이 기억이 난다.) 그 후 공부는 공부대로 휴식은 휴식대로 분류별로 나누어 계획에 차질이 생기지 않도록 눈에 잘 띄게 크레파스로 색칠을 한 후 방문에 떡 하니 붙인다.
어릴 적 지키지도 못할 계획표지만 하루 24시간을 나누며 공부와 휴식, 그리고 또 공부라는 계획을 정하며 마음만은 편안했던 방학 생활 계획표. 계획표를 그리며 흐뭇했던 기억이 남아서일까 불현듯 대학교에 입학할 즈음 인생 계획을 그려야 한다는 압박감이 든 적이 있다. 그래서 30년은 공부하고 다음 30년은 공부를 바탕으로 일을 해 돈을 벌며, 마지막 30년은 번 돈으로 노후를 즐길 것이라는 일명 나만의 30 계획을 만들었다.
이러한 계획이 초등학교 방학숙제로 한 생활계획표 그리기보다 간단해서일까 아니면 획기적인 아이디어라 생각해서였을까 가끔 멍하니 달력을 볼 때면 이 계획이 머릿속 어딘가에 박혀있다 튀어나오곤 해 가끔 나의 인생 좌우명이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기도 했다.
대학 생활 초기 생각한 이 계획이 졸업을 할 즈음 불현듯 ‘나는 취업 전선에 뛰어들기 보다는 공부를 몇 년 더해야 30 계획에 어긋나지 않겠지’라는 생각이 들었다. 억지로 이 계획을 지키려고 하기보다는 나빠진 경제 상황과 취업을 아직 못하고 있다는 현실적인 타협안이 30 계획에 힘을 싣지는 않았는지. 물론 서른 살이 되기 전 취업도 하고 돈도 벌었다. 하지만 그때마다 아직은 돈에 목숨을 걸 때가 아니라는 생각에 공무원 공부와 토익 공부 등 지갑보다는 볼펜을 잡는 날이 더 많았다.
그러다 맞이한 29세 어느 날 저녁.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교재를 방바닥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빨간 노끈으로 책을 묶고 분리수거 장소로 몇 차례 왕복으로 책꽂이를 텅 비웠다. 허전함에 각 방에 흩어진 가족 앨범, 읽지는 않지만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아버지께서 사다 놓으신 생활 속 동의보감 7권 등 집안 곳곳에 잡학다식을 도와 줄 여러 가지 책들을 책꽂이에 올려놓았다. 마지막으로 정전 때를 대비해 사놓은 어른 종아리만한 양초 두 개를 올려놓으니 예전만큼 방이 꽉 찬다.
‘공부라는 것에 이제 미련을 가질 때가 아니다. 머릿속으로 들어올 것은 이제 책이 아니라 사회에 있을 것이다. 이제 서른 살이다. 노래방에서 서른 즈음에를 부르는 날도 이제 그만이구나. 이제 일을 시작하자’
이때 불현듯 드는 생각이 바로 30 계획이었다. 뜻하지 않게 세운 계획에 나 자신도 모르게 맞춰가고 있는 듯했다.
아무튼 이때부터 공부보다는 통장을 불리는 일에 더 집중했다. 아니 지식을 공유한 책들이 없어서 일수도, 당장 상사에게 깨지지 않기 위해 해야 할 일이 더 급하게 와 닿아서 일수도…. 그렇게 수년간 통장에 숫자를 차곡차곡 찍어나가며 사회의 한 구성원으로서 학창시절 보았던 어른들의 모습을 닮아가고 있다고 생각했다. 아침에 출근하고 가끔 저녁에 얼큰하게 취해 귀가하고 모처럼의 휴일에는 지쳐 쓰러져 자다 가족들의 성화에 출근보다 더 힘든 외출을 하게 되는 그러한 어른으로…, 이제 취미는 급여 통장에 찍힌 금액의 숫자를 줄이는 일밖에 없는 듯했다.
어느 날 모처럼 차를 몰고 야외로 나가 아이웰빙(eye wellbing:좋은 것을 본다는 뜻의 신조어)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저녁 먹을거리를 사러 대형마트에 들렀다. 새로 생긴 마트여서 그런지 이리저리 구경할 것이 많았다. 그중 세련된 인테리어로 입점한 서점이 눈에 띄었다. 새빨간 간판과 그 밑에서 정신없이 바코드를 읽고 있는 푸른 색 옷을 입은 점원, 그리고 그 앞에 빈틈없이 채워진 책들. 물건을 고르듯 카트를 몰고 습관처럼 서점으로 향했다. 이후 이책 저책을 마구잡이로 빼어 첫 장부터 끝 장까지 한 번에 주우욱 넘기며 손때만 묻히기를 여러 번.
지식, 지성인이란 대학생의 입에서만 담는 언어며 실제는 돈과 권력이 모든 것을 이기고 정당화 시키는 힘을 가진 것이라 생각했다. 이것의 바탕이 30 계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서류종이가 아닌 책을 만지고 있노라니 지식과 지성은 학교 밖에서도 통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교복 속에 있던 마음이 생겨났다. 그리고 무턱대고 외국어 서적 한 권을 카트에 담고 계산을 해버렸다. 그리고 집에 와 제일 먼저 한 일이 장식장에 꽂힌 것들을 치우고 책을 꽂아 책꽂이로 변신시킨 일이었다. 이제 남은 것은 펜을 잡는 일뿐이었다. 외국어. 아무리 해도 안 되는, 그래서 수많은 과목 중 왜 배워야 하는지도 이해도 암기도 안 되었던 영어, 하지만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영어책을 내손으로 집어다 놓은 것이다.
고민이다. 서른 살 이후 지식이 머릿속으로 들어갈 틈이 있을까. 30 계획이 일그러지기 시작한다. TOEFL이라는 알파벳 다섯 개가 자꾸만 아른거린다. 시험을 칠 생각도 영어단어를 다시 아침 저녁으로 외울 자신도 없다. 그래도 자꾸만 무언가 새로운 것을 눈으로 읽고 머릿속에 넣고 싶어진다. 30 계획을 바꿔야 할까.
그때 이후 책장에는 여러 권의 소설책과 교양서적이 자리 잡았고 수년 간 단 한번 불을 밝힌 양초가 자취를 감췄다. 그래서 다시 만든 계획이 바로 90 계획이다. 죽을 때까지 지식을 쌓고 돈을 벌고 노후를 즐길 수 있는 일을 하면 된다는 것을. 지금은 초등학교 문예반에서 시작한 글쓰기가 국어국문학과를 거쳐 출판사에서 글을 쓴다.
인생은 나누는 것이 아닌 하루 하루를 잇는 것이라 생각한다.